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문단 편집) === 경제 파탄 === 물론 이런 학정 속에서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으니 적도 기니의 경제도 완전히 망가졌는데, 1970년대의 적도 기니는 경제 개발 계획과 공공 지출에 대한 회계 시스템이라는 것이 문자 그대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통계학자들에 대한 탄압 때문에[* 그 일례로 1970년에 적도 기니의 인구가 22만 5천 명으로 잡히자 적도 기니의 인구가 백만 명 정도라고 생각했던 응게마는 이 통계 데이터가 너무 낮아 보인다고 판단하여 '숫자를 세는 법을 배워야 한다'며 통계청장 사투르닌 안토니오 은동고(Saturnin Antonio Ndongo)의 손과 발을 잘랐다고 한다.[[https://www.jeuneafrique.com/mag/640572/politique/ce-jour-la-le-12-octobre-1968-le-tigre-de-malabo-arrive-au-pouvoir/|근거]]] 70년대의 적도 기니의 경제 데이터는 거의 없을 정도다. 그러면서 응게마는 '내가 집권하는 한 이 나라에 자본주의란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응게마는 우표 수집가들을 위해 몰래 희귀 우표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었다.] 그리고 응게마는 외국 기업을 '우리의 부를 훔치려 오는 제국주의 거머리'로 간주하여 이들을 모조리 쫓아내고는 식품에서 의약품까지 모든 제품은 적도 기니에서 생산된 것만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적도 기니의 GDP는 응게마가 집권할 1968년에는 6751만 달러였지만, 응게마가 퇴진하고 1년이 지난 1980년에는 5064만 달러로 12년 만에 이전의 75% 정도로 추락했으며, 응게마 집권기의 적도 기니의 평균 경제 성장률은 -2.4% 정도였다. 특히 1977년에 1.04억 달러 정도였던 적도 기니의 GDP는 불과 3년 뒤인 1980년 기준으로 5064만 달러로, 3년 만에 무려 이전의 48.7% 정도로 폭락했다. 심지어 1978년 기니의 수출량은 1970년대 초보다 5배나 적었고[* 그나마 이들도 절대다수가 카카오 수출이었다.] 당시 적도 기니의 GDP 중 무려 90%가 외국의 원조로 구성될 정도였기에 적도 기니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은 외채를 진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비록 응게마 하에서 마지막으로 GDP 통계가 잡힌 1977년 기준으로 적도 기니의 1인당 GDP는 383달러(2023년 환율로 1890달러) 정도로 집계되어 [[최빈국]] 수준은 겨우 면한 것으로 나오긴 했으나, 당시 적도 기니 GDP의 90%를 외국의 원조가 차지했을 정도였다는 것과 인플레이션율이 당대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았다는 것, 적도 기니에서 통화와 상업 활동의 개념이 사실상 소멸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적도 기니 국민들의 실질 소득은 이것보다 훨씬 낮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응게마는 의료에는 돈을 전혀 쓰지 않았기에 식민지 시절에 우수한 수준이었던 적도 기니의 의료 인프라는 문자 그대로 초기화되었다. 1979년 시점으로 적도 기니의 국민들 0.8%에 달하는 2천 명이 [[한센병]] 환자였고, 나라에는 광범위하게 [[말라리아]]가 퍼졌으며, 원래 아프리카에서 영유아 사망률이 제일 낮던 적도 기니가 응게마 시기에는 비공식적으로는 무려 60%가 되어 아프리카 내에서도 영유아 사망률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되었으며[* 다만 공식 기록에 따르면 응게마 시기에도 영유아 사망률은 지속적으로 감소한 것으로 나온다.], 평균 수명은 43.73세(1968)에서 40.5세(1977)로 추락했다.[* 심지어 1976년에 적도 기니의 평균수명은 무려 28.9세였다.] 게다가 서구권과의 무역도 금지되었던 적도 기니는 인플레이션율도 당시의 아프리카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국가였고, 독립 직후 기준으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경제 인프라가 발달하고 부유한 나라 중 하나에서 살던 적도 기니의 국민들은 영양 실조에 시달리게 되었지만, 응게마는 식량들을 매우 저렴하게 매입한 후 의도적으로 평시 가격의 80~100배나 되는 고가에 재판매하며 [[폭리]]를 취했다. 심지어 응게마는 음식이 판매될 시기도 손수 결정하여 시판된 음식들은 대부분 유통기한이 한참이나 지난 상태가 되었다. 게다가 빵, 토마토, 설탕, 우유 등의 '서구식 음식'들은 금지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통령과 군대, 경찰, 경호원들에게만큼은 봉급이 꼬박꼬박 주어졌다.[* 그러나 이것도 응게마가 오래 집권하며 나라가 완전히 파탄나면서 옛말이 되어 군대와 경찰은 커녕 경호원조차 봉급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애초에 전술한 것처럼 응게마의 경호원조차 수렵채집으로 연명해야 했던 판에 당시 적도 기니의 일반적인 군대와 경찰이 제대로 먹고 살 수 있었던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노동은 전국민의 가장 중요한 의무로 간주되었으나, 노동권은 전혀 존재하지 않아 모든 노동권 요구는 '반혁명적이고 전복적이며 전형적인 국가의 적'으로 간주되는 중범죄가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농업도 파탄났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